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단 편집) == 기타 == >"나는 [[위안부|이 고통, 이 끔찍한 아픔]]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픔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민족, 우리 할아버지도 이런 끔찍한 집단범죄의 희생자였고,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 (아르메니아인) 또한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의 상처는 가만히 두면 곪아 터질 수밖에 없고, 이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 >[[글렌데일]](2번 항목) 시장 자레 시난얀 (Zareh Sinanyan) [[https://rafu.com/2013/08/comfort-women-monument-unveiled-in-glendale/]] 세계 각지에 이 학살에 대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미국]], [[캐나다]], [[프랑스]], [[우루과이]] 같은 아르메니아계 디아스포라 커뮤니티가 발달한 나라들 혹은 [[키프로스|남키프로스]]처럼 튀르키예와 긴장 관계에 있는 나라에 있다. 지리적, 문화적으로 멀고 터키와 외교적으로 가까운 입지 상 한국과 상관없는 역사 같지만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국외 최초로 [[위안부 평화비]]가 새워졌는데 여기에 현지에 굉장히 많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의 연대와 지지 덕분에 일본 정치인, 일부 일본계 주민들의[* 일부란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게 [[일본계 미국인]] 상당수는 사실 본국과의 거리감, 미국생활 하며 체득한 자유주의적 성향 뿐만 아니라 2차대전 시기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태평양 전쟁에 휘말렸기 때문에 겪은 박해의 역사]] 때문에 일본 본토의 극우 성향에 찬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디까지나 여전히 일본 본토와 부정적인 의미에서 관계가 지나치게 깊은 일부가 설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밖에도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4/41/Armenian_Genocide_memorial_in_Aleppo_Syria_at_the_Armenian_church_40_martyrs.jpg/150px-Armenian_Genocide_memorial_in_Aleppo_Syria_at_the_Armenian_church_40_martyrs.jpg|시리아]][* 사실 시리아는 강력하게 이 학살을 비난하며 아르메니아를 편드는데 이 학살 와중에 현대 튀르키예-시리아-이라크 국경 지대에 살던 아랍인들도 대거 학살당하고, 현대 시리아 지방으로 강제 이주 당한 비극이 있기 때문이다. 추모비도 여럿 되고 아예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 교회까지 따로 세웠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아르메니아에는 시리아 기독교인 학살 추모비도 세워져 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7/7d/Armenian_Catholicossate_of_Cilicia_-_Genocide_Memorial_chapel.jpg/150px-Armenian_Catholicossate_of_Cilicia_-_Genocide_Memorial_chapel.jpg|레바논]],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9/9c/Armenian_Genocide_Memorial%2C_Armenian_Church%2C_Kolkata.jpg/150px-Armenian_Genocide_Memorial%2C_Armenian_Church%2C_Kolkata.jpg|인도]], [[https://enacademic.com/pictures/enwiki/65/Armenian_Genocide_Memorial_at_the_Vank_Cathedral_in_Isfahan.jpg|이란]] 등에도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로 이들 이슬람 다수 및 비기독교권 나라들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을 이전부터 성토해오고 아르메니아를 편들어왔기에 저런 게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말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ErmeniSoykirimAniti.jpg|width=275]] 1919년 튀르키예에서도 추모비가 세워졌으나 3년 만에 파괴되었다.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소녀 에우로라 마르디가니안(1901~1994)이 쓴 책 <유린당한 아르메니아>(Ravished Armenia)가 있다. 1918년 미국에서 출판되어 1919년 무성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흥행은 망했고 잔인성 때문에 여러 나라 개봉도 취소되었다. 게다가 원작자 마르디가니안과 저작권 문제로 고소 소송까지 벌어지며 시끄러운 모습을 보였고 2009년에 아르메니아에서복원되어 DVD가 나왔다. 2016년 아르메니아는 에우로라 프라이즈라는 평화상을 제정했다. 1991년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 앙리 베르뇌유 감독이 만든 자전적 영화 어머니(Mayrig)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다루고 있다. [[세자르 영화제]] 음악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고 프랑스 국립영화아카데미에서도 수상했다. 2002년, 아르메니아-이집트계 캐나다 감독인 [[아톰 에고이안]]은 이 사건을 소재로 아라라트라는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에고이얀은 영화 공개 당시, 칸 경쟁에 출품하지 않고 비경쟁에 출품했는데 경쟁 부문에서 상을 받지 못하면 사건이 묻혀질 것을 우려했다는 뉘앙스로 발언한 바 있다. 실제로 개봉 당시 에고이안 본인에게 튀르키예/무슬림 계열 극우들에게서 협박 메일과 비난이 날아왔다고 한다. 대학살 이후 현대를 살아가는 아르메니아인/이민자들이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며, 에고이얀 특유의 군상극적인 성향이 강하다. 다만 에고이얀의 최고 걸작까지는 아니라는 게 중론. [[튀르키예 드라마]]가 [[아르헨티나]]나 남미 각지에서 인기를 끌자 아르메니아계들이 조상 모독이라고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튀르키예 드라마랑 아르메니아의 조상이랑 무슨 관련이 있냐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튀르키예 독립전쟁]] 이후 체결된 [[로잔 조약]]으로 튀르키예 공화국 영토에서 거의 추방된 그리스인과 달리 아르메니아인들은 여전히 튀르키예에 남아 있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20~50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스탄불]]에서는 아르메니아어 신문도 발행될 정도로 꽤 큰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학살 당시 강제 이주지로 설정된 튀르키예 남동부 지방과 [[시리아]]에도 많은 수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는 자신이 아르메니아인임을 숨기는 경우가 있어 간혹 시골에서 누군가 죽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당연히 무슬림이거니 하고 이슬람식 장례식을 준비하다가 알고 보니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라는 걸 알고 당황했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나오곤 한다. 물론 현지 문화에 동화되어 이슬람교로 개종한 아르메니아인도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보라색의 꽃 모양 스티커를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꽃의 정체는 [[물망초]]라고 한다.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라는 뜻이다. [[분류:1890년대 사건사고]][[분류:1900년대 사건사고]][[분류:1910년대 사건사고]][[분류:캅카스의 역사]][[분류:학살 사건]][[분류:아르메니아의 역사]][[분류:오스만 제국의 역사]][[분류:전쟁범죄]][[분류:튀르키예-아르메니아 관계]][[분류: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관계]][[분류:튀르키예의 역사 왜곡]]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